서랍 정리하는 날

제목: 서랍 정리하는 날
저자: 서선정 글, 그림
출판사: 봄볕
발행일: 2026. 01. 31
서평: 김은심 (강원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서선정 작가는 일상이 지나가며 남기는 시간과 기억을 섬세하게 그려 온 작가다.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2022년, 2024년, 2025년, 2026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2023년에는 천보추이 국제아동문학상 최우수 그림책상을 수상했다. 그의 신작 『서랍 정리하는 날』은 이사를 앞두고 엄마와 아이가 서랍을 정리하는 하루를 담은 그림책이다.
이야기는 이사 준비라는 익숙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거실 한가득 정리할 옷이 쌓여 있지만, 그만큼 ‘이야기할 거리’도 함께 쌓여 있다. 그러니 정작 정리되는 것은 서랍이 아니라 시간이며 가족의 이야기다. 서랍에서 꺼낸 옷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함께 살아낸 계절의 흔적이다. 서선정 작가가 색연필로 채운 화면은 매끈하기보다 결이 살아 있어 따뜻하다. 한 겹 한 겹 눌러 그은 선들은 바느질 땀처럼 종이 위에 남고, 겹쳐진 색은 기억의 깊이를 보여준다. 멜빵바지와 가족 티셔츠, 구름 잠옷, 코트와 스웨터, 그리고 배냇저고리가 풍경처럼 펼쳐진다. 화면의 대부분은 옷이 차지한다. 할머니, 엄마와 아빠, 아이, 그리고 강아지는 그 곁에 작게 놓인다. 옷은 시간과 이야기를 품은 세계처럼 보이고, 인물은 그 안을 살아간다.
보통 정리란 흐트러진 것을 치우고 질서를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정리는 버림이 아니라 이어짐이다. 유행이 지난 바지는 가방으로, 아이의 원피스로, 조끼로, 강아지 옷으로 다시 태어나고, 재봉틀은 세대를 건너 전해진다. 형태는 바뀌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밝고 선명한 색채는 기억이 쉽게 바래지 않음을 말해준다. 그림책의 거의 모든 장면에는 검은색 물고기들이 숨어 있다. 왕방울 같은 눈을 가진 그 존재는 아주 작고 여기저기로 흘러가고 있어 의식하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우리의 지나간 시간이 그러하듯이. 장면이 바뀌어도 그 눈은 같은 자리에 머무는 듯 보이다가, 기억이 현재의 자리로 단단히 안착하는 순간 설핏 사라진다. 그리고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비법 만두를 엄마와 아이가 함께 먹는 마지막 장면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며 유영한다. 바느질은 천을 잇고 음식은 사람을 잇는다. 그렇게 이 책은 세대를 잇는 기억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정적 가치(sentimental value)를 떠올리게 한다.
『서랍 정리하는 날』은 정리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이어짐에 관한 이야기다. 옷을 꿰매듯 시간을 꿰매고, 사라진 줄 알았던 결을 현재로 불러오는 일. 서랍을 닫는 순간에도 사라지는 것은 없다. 다만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과 함께 살아간다.
댓글 0개
번호 |
제목 |
글쓴이 |
등록일 |
조회수 |
|---|---|---|---|---|
| 733 |
복숭아와 애벌레
|
관리자 | 2026.08.25 | 315 |
| 732 |
대현 씨는 지금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관리자 | 2026.08.25 | 320 |
| 731 |
마음 그릇
|
관리자 | 2026.07.29 | 457 |
| 730 | 제발 넘기지 마! | 관리자 | 2026.07.29 | 430 |
| 729 |
나의 첫 번째 미역국
|
관리자 | 2026.06.24 | 726 |
| 728 |
바람 관찰자
|
관리자 | 2026.06.24 | 607 |
| 727 |
내가 바라는 건
|
관리자 | 2026.05.28 | 780 |
| 726 |
세상달강
|
관리자 | 2026.05.28 | 789 |
| 725 |
초록의 마법
|
관리자 | 2026.04.22 | 708 |
| 724 |
매미와 늙은 소
|
관리자 | 2026.04.22 | 803 |
| 723 |
언제나 개나리
|
관리자 | 2026.03.17 | 845 |
| >> |
서랍 정리하는 날
|
관리자 | 2026.03.17 | 963 |
| 721 |
탐라순력도 1702년, 제주를 돌아보다
|
관리자 | 2025.12.18 | 1461 |
| 720 |
어느 날 문어가 되어버린 내 친구
|
관리자 | 2025.12.18 | 1341 |
| 719 |
내가 모은 마지막 순간들
|
관리자 | 2025.11.15 | 1374 |
| 718 |
모래성 쌓기 공식
|
관리자 | 2025.11.15 | 1465 |
| 717 |
걱정 돌멩이
|
관리자 | 2025.10.17 | 1241 |
| 716 |
고래가 죽으면
|
관리자 | 2025.10.17 | 1384 |
| 715 |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는 보통 아이에요
|
관리자 | 2025.10.17 | 1038 |
| 714 |
슬픔구멍
|
관리자 | 2025.08.12 | 1446 |





